안녕하세요. 26세 남성 멘티입니다. 저는 아주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3D, 사진 편집 등을 비롯한 컴퓨터 그래픽도 배웠고요.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왔고 또 컴퓨터를 활용한 다른 표현 도구가 생기면서 할 줄 아는 것, 할 수 있는 게 정말 많이 늘어났지만 정작 제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기계로 비유하자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열심히 개발하고 키워왔으나 막상 그 기계로 만들고 싶은 게 없는 상황입니다.
지금까지는 유튜브 섬네일, 캐릭터 일러스트 외주, 카카오톡 이모티콘 제작 등 제가 보유한 기술을 이용해 간간이 수익을 얻긴 했으나 너무 공허합니다. 좋은 카메라가 있으나 찍고 싶은 피사체가 없고, 좋은 차가 있는데 가고 싶은 곳이 없는 그런 기분입니다.
이런 상황이 너무 지겨워서 디자인 / 그림을 비롯한 컴퓨터 그래픽 관련 기술들이 제 가장 큰 무기이자 가장 큰 족쇄로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창의력이 필요 없는 직무는 저와 정말 맞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건 미적으로 개선하고 싶고, 꾸미고 싶습니다. 주식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가장 먼저 한 것이 차트를 예쁘게 꾸미는 것일 정도니까요,
글 너무 길어졌네요. 대선배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표현하고 싶은 게 없고, 쌓아온 것을 다 내려놓고 싶었던 순간이 있으셨는지, 자신보다 월등한 실력자들을 보며 무력감과 열등감을 느끼신 적이 있으신지,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정말 절실히 궁금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두운 바다에서 헤매는 기분입니다. 등대가 되어줄 지혜를 부탁드립니다.
메신저보다는 표현하고 싶은 메시지가 중요합니다
안녕하세요. 멘티님. 우선 많이 답답할 것 같습니다. 미술이나 디자인 계통 후배님한테 이런 질문을 많이 받곤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기 어려웠을 텐데, 이미 이런 용기를 낸 것만으로도 반은 해결한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라고 비슷한 경험을 못 해봤겠습니까. 너무 많이 느껴요. 세상에는 숨은 고수들이 너무 많고 멋진 아이디어로 무장한 콘텐츠가 넘쳐납니다. 이 법칙이 디자인뿐만 아니라 광고나 마케팅에도 적용돼 무력감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멘티님이 느끼는 것은 대부분의 예술인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저 역시 그렇고요.
멘티님의 고민을 단박에 해결할 특효약이 제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 경험을 공유할게요. 우선 멘티님이 느낀 문제는 멘티님 개인이 원인이라기보다는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병폐에 가깝습니다.
우리나라는 인터넷 강국입니다. 인터넷이 정말 빠르고 어디에서나 잘 터집니다. 하지만 인터넷 ‘인프라’ 강국이지 인터넷 ‘콘텐츠’ 강국은 아닙니다. 좋은 카메라가 있으나 찍고 싶은 피사체가 없고, 좋은 차가 있는데 가고 싶은 곳이 없다는 고민과 일맥상통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을 따지기 전에 성인으로서 독립부터 하고 싶었어요. 내 용돈은 내가 벌어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도록 독립하고 싶었어요. 어차피 돈 버는 건 힘들 테니 가급적 돈 많이 주는 회사에 들어가는 길을 택했어요. 막상 회사에 다녀보니 내고 싶은 아이디어나 해보고 싶은 새로운 프로젝트가 많았는데, 다들 귀찮아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다가 그게 작품활동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퇴근하고 잠깐, 주말에 짬을 내서 작업하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렇게 작품이 쌓이다 보니 전시가 하고 싶어졌어요. 회사에서 돈도 벌겠다. 여유 있게 전시장을 얻어 전시하게 됐어요.
작품이 팔리고 안 팔리고를 떠나 그냥 아무 구속 없이 마음대로 표현하고 전시하는 것만으로 대단히 만족했는데, 전시장에서 작품이 팔리는 거예요. 기대도 안 했는데 작품이 인정받고 팔리기까지 하니 큰 보람이 됐고 힘든 회사생활의 활력소가 되더라고요.
표현이라는 것이 꼭 멘티님이 보유한 기술로만 발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수는 노래로, 연기자는 연기로, 안무가는 무용으로, 예술가는 작품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다른 툴(tool)로도 얼마든지 가능해요.
조소를 전공한 신성우 씨는 가수를 하고 동양화를 전공한 감우성 씨는 연기를 하고 농구선수를 한 서장훈 씨는 예능을 하잖아요. 반대로 연기를 하는 하정우 씨는 작품을 하고 디자인을 하잖아요. 저도 회화와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지금은 상품기획과 마케팅으로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것을 드러내고 있어요.
표현하고 싶은 메시지가 중요한 거지 메신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리고 쌓아놓은 것을 다 내려놓아도 괜찮아요. 멘티님의 여러 재능이 멘티님에게 돈을 벌어다 주지만 행복과 보람을 안겨주지 않듯, 좋아하는 것으로 돈을 벌려고 하니 힘든 거예요. 그리고 잘하는 것으로 행복을 추구하려 하니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면 전쟁터를 바꿔라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어요. 그들과 경쟁하려 하면 당연히 무력감과 열등감을 느끼겠죠. 마케팅에는 이런 말이 있어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면 전쟁터를 바꿔라’. 제가 졸업하고 디자인 회사에 갔다면 디자인 잘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겠죠. 전공자니까요.
하지만 일반회사에 들어가니까 조금만 디자인 능력을 보여도 엄청난 능력자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회사 다니면서 단련한 기획서 작성능력과 보고서 작성능력으로 창업도 할 수 있었어요. 예술 분야로 창업할 때 정부 지원사업을 따내는 게 다른 IT 분야에서 지원사업을 따내는 것보다 진입장벽이 낮더라고요.
멘티님이 가진 기술이나 테크닉 즉, 사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본인이 처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좋은 카메라를 가졌다고 해서 꼭 피사체를 찍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꼭 카메라로 피사체를 찍어야 할 필요도 없는 것 같아요. 좋은 차를 가지고 있으면 꼭 어디를 가야 하나요? 그리고 가고 싶은 곳이 있더라도 꼭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영국 유학이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다시 정립하게 된 계기였어요, 우리나라에서는 디자인을 아직도 ‘눈에 보이는 것을 예쁘게 꾸미는 것’이라 여겨요. 세탁을 예로 들어볼까요. 세탁을 디자인적 의미로 풀면 옷을 깨끗하게 하는데 필요한 일련의 과정을 ‘기획’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세탁기’의 외형을 멋지게 만드는 것을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옷감을 세탁할 때 지금은 세탁기가 필요하지만 세탁기라는 형태와 기술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데 말이죠. 예전에는 어머니들이 쓰는 빨랫방망이가 세탁기였고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서없이 쓰다 보니 길어졌어요. 멘티님이 질문한 것을 토대로 답변했는데 사실 더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요. 혹시 더 궁금한 게 있거나 문의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또 연락하세요. 잇다를 통해서 다시 만나도 좋고 커피 한잔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좋은 인재를 만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니까요.
아주 작게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