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번째 회사를 다니면서 느끼는 점(Part 4 : 두번째 회사 중기)
[사고나기 전 두번째 회사 생활 일부]
채를 잡았던 '원가'를 기반으로
동종업계 재무분석과 신규사업 ITEM발굴, 그리고 경제성검토를 진행했었다
그리고 가을부터는 년간 예상손익을 추정하고 익년도 사업계획을 짜며,
동시에 경제전망 보고서도 작성을 했다.
(어떻게 하는 것인지 이야기하는 것은 따분한 업무이야기므로 본 내용에서는 패스)
물론, 기획업무로 정해진 숙명업무도 있다.
예산편성과 수립/통제 - 각 부서별 예산관리 등
회의체 운영 - 대게 임원급 이상이 참여하는 회의때 회의자료를 취합하여 검증하고 보고
(물론, 토시하나 맞춤법하나 숫자하나까지 모두 완벽해야 함)
공시 - 큰 기업은 IR팀이 따로 있으나 없을 경우 웬만하면 기획팀이 하는 업무로
회사의 분기, 반기, 년간 손익을 전자공시시스템(DART)에 공시하는 업무
내가 겪어 보고 또 들어본 바에 의하면 기획팀은 숙명업무로 예산이나 회의체등은 필수다.
또한, 구매팀이 법인심사를 준비할때도 같이 업무를 하며, 도움을 주었다.
(B/L, P/L, C/I, BAF, CAF도 이때 처음 알게 됨)
그렇게 협업을 하며 열의를 가지고 기획업무를 하면서도.
아쉬운 통장잔고에.
나는 사택에 오면 이력서를 쓰며 몰래 다른 회사의 문을 다시 두드렸다.
유명한 복지로 인해 한국의 구글로 소문난 경기도 파주에 있는
'제니퍼XXX'부터 L모 그룹, 판교의 마모 회사, SK 모회사 등
이력서를 제출하고 떨어지고, 때로는 면접도 보았었다.
하지만, 짧은 경력에 3번째 회사로 이직하려는 나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두번째 회사는 외진 곳이라 이성을 만날 기회가 적어서
업무를 마치고 사택에 오면 게임을 하거나, 주말에 서울에 가서
(남자인..)친구들을 만나곤 했다.
[이제, 지난 사고에 이어서]
팀장이 먼저 퇴근을 했었다.
위에 대리님과 회사에서 저녁을 먹으며
우리도 어서 퇴근하자는 이야기를 했고,
'저는 올해 나이가 아홉수라서 생활할때 조심해야 겠어요..'
라고 내가 대리님께 이야기 했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6시..사고는 발생했다.(진심으로 말은 함부로 뱉는 것이 아닌듯..)
'해가 길어졌나.. 겨울가고 이제 봄이 오려나 보다..빨리 가서 게임해야지'
분명 이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 있으세요, 움직이지 마세요.'
사람들의 다리만 보였다.
운전대를 잡아야 할 내손이 바닥을 기고 있었다.
'뭐지?...사고난건가...저 아래에 굴러떨어진 차는 내차같은데..'
그리고 얼굴을 만져보니 따듯했다.
피였다. 다시 기절했다.
(지금도 의아하나 목격자 말로는 뒤집어진 차에서 내가 기어서 7미터나 되는 언덕을
올라왔다고 한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생존하고자 하는 본능에 몸이 움직였나 보다.
신기하다.)
그렇게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그 지역에서 수술이 가능한 병원은 없었다.
급한대로 찢어진 얼굴과 찢어진 어깨를 봉합하기는 했으나
발목은 꺽일대로 꺽여 수술이 필요한 상태였었다.
그래도 1년동안 친해진 회사 분들이 모두 달려왔다.
같은 팀 대리님, 옆부서 대리님, 생산팀, 자재팀 대리님, 과장님...
'안돼 이거 출근 안돼, 휴직해야해..박대리 EMS 불러줘. 누구는 뭐하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도 바로 오셨다.
딱 한사람.
그시간에 타부서 같은 직급의 차장님들과 회식이라며 룸싸롱을 갔던..
우리팀 차장만 오지 않았다.
고향에 와서 입원을 하며 나는 너무 억울했다.
내 잘못으로 난 사고도 아닌데 다리도 부러지고, 얼굴도 찢어지고
이 얼굴로 여자는 어떻게 만나며, 돈은 언제 모으고,
회사에 복직하면, 내자리는 있을까..어떻게 나는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말인가..
수술이 끝나고도
그런 말을 입밖으로 부모님께 하며 나의 나약해진 정신을 모조리 드러냈다.
(얼마나 가슴아팠을 것인가..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아들의 정신상태를 보는
부모님의 기분이...)
입원 기간은 4개월로 긴 편이었다.
교통사고 환자라 병원입장에서는 공단에 무슨 보조금을 받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한 병원에서도 길어야 한달이상 받아주지를 않았다.
어쩔수 없이 병원을 여러번 옮기면서 정신도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오고 있었다.
3번째 병원으로 옮길때였다.(회사도 그렇고 병원도 그렇고 자주 옮겨 다님)
구급차로 나를 데리러 온 간호사분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었다.
어떻게 병원으로 가는줄도 모른채 누워서 그 간호사만 바라봤다.
입원 수속이 끝나고 휠체어를 밀며 찾아보았으나, 다시 찾을 수 없었다.
어느날, 1층에서 우연히 그 분을 보고
머리도 감지 않은 상태에서 휠체어를 밀고 바로 갔다.
그리고 이송도와줘서 고맙다며, 예쁘신데 남자친구 없으면 번호좀 받을 수 있는지
물어봤다.(알고보니 동갑)
그렇게 번호를 받았고, 병원에서 나는 여자친구가 생겼다.
다른 병원으로 옮길때도 도와주고, 그 병원까지도 찾아왔다.
퇴원할 때는 케익도 사주고, 여러모로 나의 피폐해진 마음에 빛이 되주었다.
후에 퇴원을 하고 복직을 했을때,(다행히 내 책상은 빠지지 않음)
몸은 괜찮냐며 묻는 동시에...여자친구 소식을 접한 일부 직원들이
'치료받으라고 휴직시켜줬더니, 연예를 했네! 하하' 하며 축하해주기도 했다.
(비아냥은 아니고 다들 건강에 대한 나의 안녕을 빌어줬다.)
얼굴에 있는 흉터를 걱정할때도, 여자친구는 자기 일인것처럼 같이 걱정해주었다.
물론, 현대 의학기술에 한번 놀랐다.
프락셀레이저(흉터 안보이게), 엑셀브이레이저(붉은 흉터 연하게), 트리암시놀론주사(흉터 안딱딱하게)등등 대한민국 의료 기술 좋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이런 레이저 이름을 기억할 만큼 그때 나에게 흉터는 매우 큰 스트레스 였다.
(광고는 아니고..오죽하면 이름과 효과를 기억할까...)
지금은 얼굴쪽은 흉터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사고부터, 복직까지 4개월.
많은 교훈과 상처를 얻었고, 여자친구도 생겼다.
(후에 그 여자친구는 지금 제 아이의 엄마가 됩니다.)
숨쉬며 살아있음에 이 정도의 급여도 만족할 수 있었고, 더욱 인생을 고맙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복직 후 다시 잡은 채는 '투자 검토'였고 그것을 계기로 모든 자료를 통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해당 투자건으로 인해 주식이 폭등하고 폭락한 사유가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인지는 생략)
그 이듬해에 나는 결혼을 했고,
내가 있는 지역의 투룸에서 작지만 행복하게 신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보험사를 상대로 보상과 합의를 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도 한 덕분에
합리적인 보험금을 받아서 치료에 보탰다.
(그 공부 덕분에 부업은 아니나, 교통사고 상담을 취미로 하고 있음)
참으로 무서운 사고 였다. 에어백이 터지지 않았으면, 관뚜껑에 못이 박혔으리라..
하지만 고마운 사고 였다.
얼마나 배운 것이 많은가..
급여가 적다고, 이따위 흉터진 얼굴로 못산다고, 여자친구도 없다고
불평만 하던 내가...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되었고,
교통사고 처리방법도 꿰차게 되었으며,
사고를 통해 결혼도 하게 되었다.
살아 숨쉬는 것 자체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이다.
결혼한 첫해는 행복했다.
회사에서도 치료를 받으라고 웬만하면 정시이후에 퇴근을 바로 허락해주었고,
치료후 집에 오면 아내와 손잡고 산책을 가고, 술도 한잔 기울였다.
하지만, 사고당시 혼자만 병원에 찾아오지 않았던 차장은
배려를 하면서도 나에게 많은 압박을 주었다.
팀장의 지시로 새로온 후임에게 업무 분담을 하라고 해서 해주었으나
열의를 가지고 차근히 알려줬던 나의 의도와는 별개로
후임은 일을 잘 따라오지 못하였다.
일은 못해도 느려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후임도 배워나가는 단계이므로 이해했는데
차장은 도무지 안되겠다며, 후임에게 갔던 업무를 다시 가져와서 나보고 하라고 했다.
그렇게 중간에 끼어있으면서 업무는 가중이 되었으나,
해오던 업무라 어렵지는 않았다.
이제 후임을 둔 선배로서
현재의 내가 사회초년생이던 과거의 나를 대하듯
모르는 것은 알려주고, 실수한 것은 바로잡아주되
가끔, 때로는 여러번 참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후임의 생각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이 사람은, 예전의 나다.'
후임이 일을 따라오는 속도는 개인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었으나,
팀원과 조금의 상의도 없이 '업무를 줘라, 안되겠다 다시 가져와라.' 하는 모습....
어차피 다시 들고 올 업무라도, 팀장으로서 조금의 의견조율이 있었다면...
사실, 조직이나 업무적인 이유로 퇴사를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머리속에 자리잡은..
'팀원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데, 접대자리도 아닌데, 룸싸롱에서 술마신 사람'
이라는 기억은 쉽게 지울수가 없었기때문에
나는 팀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많은 자료를 고민하며 업무에 반영했고, 아이디어는 적어뒀으며,
검증을 통해서 만들어낸 수식이 완벽할 때에는 따로 보관을 해두었다.
그리고 지금부터 아내까지 책임지기 위해서는 대기업이 많고
외지지 않은 장소인 도시쪽으로
이직을 해야겠다고 다시 한 번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 해 겨울.
이직 기회는 정말 우연치 않게 다시 오게되었다. 어쩌면 필연적으로..
나이와 경험이 많다고 누군가의 나침반을 흔들어 놓는 실수를 범하는
"조언, 충고, 말"을 하게 될수도 있기에..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려주고, 경험을 이야기하며
그 속에서 상대방이 자연스럽게 거를 것은 거르고, 공감할 것은 공감하며,
능동적/주체적으로 스스로 답을 찾는 것이 그 무엇보다 값지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