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번째 회사를 다니면서 느끼는 점(Part 2 : 첫번째 회사)
로테이션하는 업무들은 금새 손에 익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으로 주어지는 이슈들에 대해 신입인 나로서는 손에 익기는 커녕 어떻게 어디서 부터 다루어야 할지 막막했었다.(누구나 마찬가지 일듯)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선배지만, 나에게는 선배가 없었다.
몇 번을 곱씹어 생각해보고 내가 비슷한 위치에 와서 다시 그때를 생각해봤는데도..
그 당시 선배는 선배가 아니라 악마에 가까웠다.
투자 경제성 검토를 하며, 어떻게 벤더에게 바로 네고를 칠 수 있도록 정보를 습득하고 분석해보라는 건가..
당장 명함들고 벤더에게 내 소개를 하더라도 누가봐도 회사생활 6개월밖에 안한 대학교 졸업한 사회 초년생인 것이 티가 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뭔가 아는 척 벤더에게 질문을 하고, 근거가 없더라도 어떻게든 논리를 세운 근거 비슷한 것을 가지고 확신에 가득찬 주장을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선임이 나에게 그렇게 가르쳤다.
'너가 무시당하면, 네고는 없는거야. 알아?'
그렇다면 선임은 어떻게 그런 노련함을 쌓았을까 하고 의구심이 들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독종이었다.
지금도 연락하는 첫번째 회사 현업 선임(지금이야 형이라고 부름)과 안부를 주고 받다가 들어보면
내가 그 선임을 처음 본 7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선임은 미혼이었다.
지난 이야기 때 팀장이 여자라고 언급을 했는데, 선임도 여자였다.
둘다 군대는 다녀오지 않았지만, 내가 만나본 여자중에서는 군대식 사고방식을 가장 잘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제 나는 숨이 차다.
아침에 일어나면 회사를 가기 싫어졌고,
회사에 도착해서 내자리에 앉으면 심장이 뛰었다.
억지로 시키는 PPT발표(그때는 정말 힘들었지만, 지금은 이때의 강압적 PPT발표가 매우 도움이 된 훈련이 되었다. 팩트!)때문에 회사 옥상에서 자살하는 꿈도 꿨었다.
사회초년생이 흔하다는 MOS자격증도 없이 엑셀과 PPT로 업무를 하려고 했으니
위에서 보는 시각은 오죽 답답했을터. 그래서 나는 금요일에 의무적으로 PPT발표를 하게 되었다.
평일 일과시간에는 일을 하고 저녁에는 PPT를 만들고 밤참을 먹고 PPT연습까지 끝내면
새벽 2시..그마저도 이른 감사한 시간이었다.
(한번은 새벽 2시에 피곤해서 내일하면 안되겠냐고 했다가 새벽 4시까지 갈굼당함..)
그 때 버릇이 하나 생겼다.
금요일 아침에 기숙사에서 나오기전에 나는 항상 내 책상위에 무엇인가를 세로로 세우고 나왔다.
네임펜, 수첩, 라이타 등등 아침에 보이는 것 1개를 세로로 세우고 속으로 말했다.
(오늘 PPT발표 하고 나면 또 혼나게 될거야. 그래도..죽지않고 퇴근해서 세워진 너를 다시 볼 수 있겠지?)
물론 지금도 잘 살아 있고, 그 때 퇴근해서 잘 세워져 있는 물건을 봤을 때 정말 울음이 나오곤 했다.
마치 100일 휴가로 집에 갔을 때 나를 반겨주는 아버지, 어머니를 보는 것 처럼....
나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고, 선임과 팀장이 지시한 대로 훈련을 거듭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성에 결코 찰리가 없었다.
그렇게 나에 대한 이미지는 하향곡선을 그리고 절대로 우상향으로 바뀔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도, 어떻게 들어온 회사인데...어디가서도 받지 못하는 돈인데... 라며 참아내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자존감과 자신감을 단 8개월만에 모두 잃어버렸다..
(그래도 나는 어떻게는 뭐든 잘해낼 거야..라는 작은 자신감마저..없어짐)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만두면 1년도 못채우고 그만두는 건데 어디가서 경력인정도 못받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 실패자로 낙인이 찍힐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부모님께도 죄송할 것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그때 터졌다.
당시 중국에 새로운 몇백억 정도 되는 새로운 투자를 하기 위해 투자검토를 하고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던
중이었다. 열심히 한 덕에 진도는 빠른 편이었다.
그리고 12월 30일 외할머니가 위중하다는 전화를 받았고 이를 팀장님께 말씀 드렸다.
'야 지금 시기가 코앞인데. 그리고 오늘 종무식 안할거야? 할머니 많이 아프시대? 오늘 돌아가신대? 내가 볼때 할머니를 뵌적은 없는데 사람 그렇게 쉽게 안죽으니까 가더라도 종무식은 하고가. 그리고 가서도 문제 없는 거 같으면 상황봐서 다시 복귀해'
'....네..종무식 참여하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겠습니다.'
그렇게 종무식을 참여했고, 급히 서울로 운전대를 잡았던 나는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했다. 도착하기 20분전에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회사로는 복귀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1살때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훈련소때, 외할아버지는 자대배치받고 5주후에 돌아가셨다.
남은 외할머니의 임종은 꼭지켜드리겠다고 수백번 다짐했었다.
난 돌아가신 조부모님과 외조부모님의 얼굴을 항상 차가워진 순간에만 만지고 울 수 밖에 없었다.
'....씨발...내가 돈을 바랬습니까...살려달라고 했습니까....할머니 얼굴한번 보려고 한건데...'
라며 새해가 밝을 때까지 속으로 되내였다.
'할머니...우리 할머니 얼굴 한 번 보게만...해달라고..한건데..'
그렇게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간성을 상실한 회사에서는 더이상 돈을 받으며
일할 수 없다고 말하며 정처를 마련하지도 않고 바로 퇴직했다.
그때도 물론
'나보다 더 힘든 상황인 사람도 많을 것인데, 나란놈은 결국 여기까지 인가 보구나.'
라며 자책도 하고 나약해졌다.
하지만,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나는 어학연수를 떠나기로 했다.
그렇다고 돈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멀리 갈 수도 없었기에
가까운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다.
PPT에서도, 업무에서도...영어가 부족했다고 무시당하던 상황들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모른다고 그렇게 면박주고 몰아세우시지 마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사회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영어로 나를 비난하고 면박을 주든, 아니면 잘해보라고 웃으며 동기부여를 해주든
영어가 안되는 건 나의 귀책사유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토익 650으로 합격했으니 영어가 저 밑바닥인건 맞다.
물론 토익이 스피킹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문법조차도 헷갈리며 업무를 했다.
영어를 많이 쓰는 편은 아니었으나....사용하는 상황에서는 늘 문제가 발생했다.
그렇게 회사를 그만두고 일주일간 정비를 하고 바로 어학연수를 떠나게 되었다.
나이와 경험이 많다고 누군가의 나침반을 흔들어 놓는 실수를 범하는
"조언, 충고, 말"을 하게 될수도 있기에..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려주고, 경험을 이야기하며
그 속에서 상대방이 자연스럽게 거를 것은 거르고, 공감할 것은 공감하며,
능동적/주체적으로 스스로 답을 찾는 것이 그 무엇보다 값지다고 생각합니다.